[정경의 오페라 9단] 라트라비아타, 왕의 행진이 시작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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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operama 작성일2017-01-17 조회5,556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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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제뉴스) 정경 칼럼니스트 = 오늘날 알려진 찬란하고 화려한 명망과는 달리 베르디는 지독히도 불행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어릴 적부터 사랑을 키워 온 여인과 결혼에 이르렀을 때만 해도 베르디의 앞날은 행복으로 가득할 것처럼 보였다. 결혼 직후 얻은 딸과 아들의 존재 역시 그의 행복을 더욱 공고히 하는 듯했다.
그러나 딸과 아들이 병마로 세상을 떠나고, 급기야는 영원한 동반자임을 맹세한 아내마저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사랑하던 가족을 모두 잃고 만 베르디의 나이는 겨우 서른한 살이었다. 거대한 상실감과 슬픔에 빠진 베르디는 오페라 작곡에 몰두하여 아픔을 잊어보려 노력했으나 그마저도 참담한 성과만을 거두었다. 심지어 그는 작곡가로서 절필을 선언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할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동료들과 주변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다시 일어선 베르디는 자신의 아픔을 발판으로 오페라 '나부코', '이 롬바르디', '에르나니', '리골레토' 등 명작 오페라를 연달아 작곡해 발표한다. 베르디가 오늘날까지도 '오페라의 왕'으로 불리는 이유는 뛰어난 예술성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오페라 작품은 당시 오스트리아의 압제에 시달리던 이탈리아 국민의 마음을 위로하고 달래는 정서가 담겨 있었다. 베르디의 오페라는 작품 그 자체가 이탈리아 국민들의 정서를 예술품으로 승화시킨 결과물이었다.
베르디에게는 가족과 사별한 젊은 날의 슬픔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 연인을 위해 작곡한 작품이 있는데, 이 작품이 바로 그 유명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이다.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는 베르디가 40세이던 1853년에 제작됐다. 베르디의 최전성기에 등장한 작품으로 '리골레토', '일 트로바토레', '아이다', '오텔로' 등의 대작들과 함께 베르디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작품은 1948년 1월,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춘희 : 동백 아가씨'라는 제목으로 상연됐으며, 이는 한국에서 공연된 최초의 오페라였다.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라는 제목은 '길을 잘못 든 여자' 혹은 '바른 길을 벗어난 여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는 여주인공인 비올레타 바렐리의 극 중 직업, 코르티잔에서 비롯되었다. 코르티잔이란 상류사회 남성 사교계 모임에 동반하여 그 남자의 공인된 정부 역할을 하던 여성을 의미했다. 미모는 물론 시, 음악, 춤에서 뛰어나야 했으며, 시사적 상식과 교양을 갖춰야 하기도 했다.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줄거리는 소설 '동백 아가씨'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삼총사'와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작가로도 유명한 알렉상드르 뒤마의 아들인 뒤마 피스의 작품이며, 1848년에 초판이 발행됐다.
소설 '동백 아가씨'는 사랑에 헌신적인 화류계 여성과 그 죽음이라는 낭만주의적 주제를 충실하게 그려내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 마르그리트는 관능의 화신으로 그려지면서 남자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젊은 남성과 그녀를 사랑하는 나이 든 남자 사이에서 삼각관계를 이룬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상대에게 헌신하지만 그에게 버림받고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절망감 때문에 서서히 죽음을 맞이한다.
이 작품은 당시 청년 작가였던 뒤마 피스의 출세작이 되었다. 그는 여세를 몰아 1852년 이 작품을 직접 희곡으로 각색하여 연극 무대에 올렸다. 연극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작품의 인기는 프랑스를 넘어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 연극이 처음 무대에 오르던 1852년 2월, 때마침 베르디는 파리에 머물고 있었다. 관람을 마친 베르디는 "이것은 우리 시대의 이야기"라며 크게 감탄했다고 한다. 슬픈 연애담 뒤에 숨겨진 비극의 근원과 현실의 문제를 읽어낸 것이다.
베르디는 곧바로 이 연극 대본을 토대로 오페라 작곡에 착수한다. 그 결과로 완성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는 마침내 1853년 3월 6일,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극장에서 첫 공연 무대를 갖는다.
사진
▲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중 제르몽의 아리아 'Di Provenza il mar'을 부르는 바리톤 정경 교수 (사진=오페라마예술경영연구소)
▲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사진=operaphil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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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딸과 아들이 병마로 세상을 떠나고, 급기야는 영원한 동반자임을 맹세한 아내마저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사랑하던 가족을 모두 잃고 만 베르디의 나이는 겨우 서른한 살이었다. 거대한 상실감과 슬픔에 빠진 베르디는 오페라 작곡에 몰두하여 아픔을 잊어보려 노력했으나 그마저도 참담한 성과만을 거두었다. 심지어 그는 작곡가로서 절필을 선언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할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동료들과 주변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다시 일어선 베르디는 자신의 아픔을 발판으로 오페라 '나부코', '이 롬바르디', '에르나니', '리골레토' 등 명작 오페라를 연달아 작곡해 발표한다. 베르디가 오늘날까지도 '오페라의 왕'으로 불리는 이유는 뛰어난 예술성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오페라 작품은 당시 오스트리아의 압제에 시달리던 이탈리아 국민의 마음을 위로하고 달래는 정서가 담겨 있었다. 베르디의 오페라는 작품 그 자체가 이탈리아 국민들의 정서를 예술품으로 승화시킨 결과물이었다.
베르디에게는 가족과 사별한 젊은 날의 슬픔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 연인을 위해 작곡한 작품이 있는데, 이 작품이 바로 그 유명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이다.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는 베르디가 40세이던 1853년에 제작됐다. 베르디의 최전성기에 등장한 작품으로 '리골레토', '일 트로바토레', '아이다', '오텔로' 등의 대작들과 함께 베르디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작품은 1948년 1월,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춘희 : 동백 아가씨'라는 제목으로 상연됐으며, 이는 한국에서 공연된 최초의 오페라였다.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라는 제목은 '길을 잘못 든 여자' 혹은 '바른 길을 벗어난 여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는 여주인공인 비올레타 바렐리의 극 중 직업, 코르티잔에서 비롯되었다. 코르티잔이란 상류사회 남성 사교계 모임에 동반하여 그 남자의 공인된 정부 역할을 하던 여성을 의미했다. 미모는 물론 시, 음악, 춤에서 뛰어나야 했으며, 시사적 상식과 교양을 갖춰야 하기도 했다.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줄거리는 소설 '동백 아가씨'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삼총사'와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작가로도 유명한 알렉상드르 뒤마의 아들인 뒤마 피스의 작품이며, 1848년에 초판이 발행됐다.
소설 '동백 아가씨'는 사랑에 헌신적인 화류계 여성과 그 죽음이라는 낭만주의적 주제를 충실하게 그려내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 마르그리트는 관능의 화신으로 그려지면서 남자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젊은 남성과 그녀를 사랑하는 나이 든 남자 사이에서 삼각관계를 이룬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상대에게 헌신하지만 그에게 버림받고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절망감 때문에 서서히 죽음을 맞이한다.
이 작품은 당시 청년 작가였던 뒤마 피스의 출세작이 되었다. 그는 여세를 몰아 1852년 이 작품을 직접 희곡으로 각색하여 연극 무대에 올렸다. 연극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작품의 인기는 프랑스를 넘어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 연극이 처음 무대에 오르던 1852년 2월, 때마침 베르디는 파리에 머물고 있었다. 관람을 마친 베르디는 "이것은 우리 시대의 이야기"라며 크게 감탄했다고 한다. 슬픈 연애담 뒤에 숨겨진 비극의 근원과 현실의 문제를 읽어낸 것이다.
베르디는 곧바로 이 연극 대본을 토대로 오페라 작곡에 착수한다. 그 결과로 완성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는 마침내 1853년 3월 6일,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극장에서 첫 공연 무대를 갖는다.
사진
▲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중 제르몽의 아리아 'Di Provenza il mar'을 부르는 바리톤 정경 교수 (사진=오페라마예술경영연구소)
▲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사진=operaphil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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