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부모님과 함께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를 티켓을 구입해 관람을 갔던 기억이 난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내용을 떠나서 지루한 전개와 방식 때문에 공연 내내 나와 부모님은 고개를 숙이고 잠을 잤다. 야심 차게 방문했던 오페라 관람은 그때의 좋지 않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솔직히 다시 오페라 관람의 엄두가 나지 않는다. 같은 상황에 놓인 대중에게 오페라마는 어떤 역할을 해낼 수 있는가?

A: 1873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테너 ‘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는 1877년 토머스 에디슨이 최초로 발견한 축음기를 발명하고, 10년 뒤 에밀 베를리너가 150회전 음반과 그라모폰을 개발한 뒤 최대의 수혜자가 되었다. “카루소는 그라모폰을 만들고, 그라모폰은 카루소를 만들었다”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서로의 발전과 성공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당시 예술가에 대한 인식은 “평범한 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는 천재성과 신성한 것이다”라고 믿었던 낭만주의 예술관이 점차 사라지고, 누구나 “나의 목소리와 악기 연주를 녹음으로 남길 수 있다”라는 기술복제 시대. 즉 생활예술의 문화가 시작되며 발전의 시작을 알렸다. 이는 불과 100여 년 전의 일이다.

지금 우리가 그 당시 혁신적으로 선풍을 일으켰던 엔리코 카루소의 음반을 듣는다면 어떨까? 선명하고 투명한 음질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의 귀와 뇌는 상당한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현대사회에서 예술과 문화는 눈부신 과학기술의 상생과 함께 상당한 속도로 발전되어 왔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감동적인 대사를 다시 보고 싶은 마음에 재차 영화관을 찾아 티켓을 예매하고 처음부터 관람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유튜브에 영화 제목과 대사를 검색하면 벌써 누군가 그 장면만을 간단하게 편집해서 올려놨기에 클릭과 터치 한 번으로 간편하게 그 부분을 볼 수 있다. 현재 영화는 물론 모든 미디어 콘텐츠가 그렇다.

재미있는 상상을 해본다. 위에 언급한 이탈리아 오페라 가수인 엔리코 카루소는 지구상에 태어난 역대 최고의 테너로 종종 평가받는다. 과연 카루소가 가장 뛰어난 가수였을까? 카루소가 태어나기 100년 전 바흐, 헨델, 모차르트 시대에도 위대한 작곡가의 작품을 노래하는 훌륭한 성악가들이 존재했으리라 추측된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녹음 기술 전이라 그때 당시의 문서에 적혀있거나 구전으로 내려오는 평론가와 관계자 또는 관객들의 이야기로만 기량의 예측이 가능하다. 즉 엔리코 카루소 이전에 그보다 높은 테크닉으로 능가하는 가수가 있었는지 우리 스스로의 확인이 불가능하다. 그라모폰의 녹음 기술 발명이 엔리코 카루소의 전설과 신화를 창조해버린 것이다.

이런 엄청난 역사와 스토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엔리코 카루소의 녹음된 음반은 지금 듣기에 대중은 물론 전공자조차 듣기가 쉽지 않다. 오페라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TV, 라디오, 컴퓨터, 스마트폰이 없는 시대에 오페라 극장은 그야말로 누구나 참석하고 싶은 파티이자 축제였다. 마이크 없이 극장 뒤에 벽 끝까지 울리는 ‘공명(共鳴)’된 ‘발성(發聲)’의 놀라운 소리, 소프라노 가수가 입고 나오는 화려한 드레스와 목걸이, 성공을 꿈꾸는 작곡가들의 기발한 작품 생산과 불꽃 튀는 경쟁, 오페라 공연 전과 후에 쏟아져 나오는 무수한 루머와 뒷이야기들. 오페라 극장은 당시의 정치와 경제, 각 분야 산업의 발전이 어우러진 ‘교차(交叉)’의 접점이었다.

위 질문자의 이야기처럼 귀한 고전 중 하나인 오페라가 지루한 추억이 되어 버린 사실이 가슴 아프다. 그렇기에 오페라마의 역할은 이 지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옛것과 새것이 하나 되는 오페라마의 공간은 당신이 어떤 장르의 고전을 관람하기 전, 당시의 흥미로운 문화의 이해를 안내하며, 그 작품은 수많은 경쟁을 통해서 살아남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매력적으로 소개하고, 과거 그들의 심장이 뛰는 현장에 잠시 머무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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