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마 콘텐츠로 풀어보는 오페라 이야기

▲ 바리톤 정경 (사진=오페라마예술경영연구소)

(서울=국제뉴스) 정경 칼럼니스트 = 1920년 여름, 푸치니는 카를로 고치가 집필한 '투란도트'의 원작을 들고 극작가 주세페 아다미, 레나타 시모니를 찾아간다. 대본 초안 작업을 제안하기 위해서였다. 여태껏 현실적이고 비극적인 이야기를 소재로만 오페라를 제작해 온 푸치니가 신비롭고 환상적인 이야기를 소재로 삼은 것은 오페라 '투란도트'의 작업이 처음이었다. 그는 이 신비로운 이야깃거리가 내리막길을 걷던 자신의 작곡 경력에 크나큰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성공적으로 극작가들을 설득한 푸치니는 곧장 오페라 제작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오페라 '투란도트' 작업은 이전의 작업들보다 훨씬 절박했다. 지나친 열정, 가혹한 완벽 추구, 광적인 집착이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푸치니는 자기 자신과 대본작가들을 채찍질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푸치니를 두고 미쳤다거나 편집증 증세를 보인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1년에 걸쳐 완성한 1막 이후 작업 속도는 현저히 늦어졌다. ‘전설 속의 중국’이라는, 경험해 본 바 없는 소재와 오로지 상상력으로만 그려내야 했던 몽환적인 배경이 큰 부담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푸치니는 이때 자신에게 예술가적 자질이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회의를 품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 매혹적인 신비의 세계를 푸치니는 포기할 수 없었다. 몇 번이고 작업을 중단해야 할 위기가 닥쳤지만 푸치니는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제2막을 완성해내고 만다.

이후 1923년 6월에 접어들면서 푸치니는 제3막의 제작에 착수한다. 그간 고생을 하면서 얻은 노하우와 경험들이 밑거름이 되어 제3막의 작업 진척도에는 거침이 없었다. 특히 류의 죽음이라는 요소는 푸치니의 창작열에 기름을 붓는 요소가 되었다. 류는 푸치니의 이전 작품들에서 등장하던 전형적인 푸치니적 히로인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기존 원작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그녀의 죽음과 관련된 음악은 푸치니가 가장 익숙하고 능숙하게 내보일 수 있는 장기이기도 했다. 멜로드라마의 대가라는 칭호가 무색하지 않을 정도의 완성도와 예술성을 담아내면서 푸치니는 제3막의 중요한 장면들을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오페라 '투란도트'의 최종장은 두 주인공인 투란도트 공주와 칼라프 왕자 간의 '사랑의 2중창'이 핵심이었다. 완성을 향해 거침없이 진격하던 푸치니의 발목을 잡은 것은 바로 이 장면이었다. 갈등의 매듭을 푸는 동시에 사랑의 가치와 메시지를 서로 확인하는 피날레 장면을 구성할 방법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은 것이다. 이 부분의 완성은 곧 작품의 완성이었고, 화룡점정은 점 하나를 찍는 과정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이로 인해 푸치니는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이미 혹독한 작업으로 인해 심신과 건강은 악화될 대로 악화된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오랜 흡연으로 그를 괴롭히던 후두암이 목을 죄기 시작했다. 그는 절박한 마음에 되는대로 여러 멜로디를 악보에 스케치로 남겼지만 어느 하나 마음에 드는 소절을 뽑을 수가 없었다. 결국 푸치니는 최종장의 곡을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만다. 푸치니 개인의 작품으로서 오페라 '투란도트'는 영원한 미완의 걸작으로 남게 되어버린 것이다.

푸치니가 갖고 있던 건강상의 문제가 오페라 '투란도트'를 미완으로 남긴 가장 큰 원인이었음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푸치니가 이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데는 분명히 다른 이유도 존재했다. 이는 바로 푸치니가 근본적으로 비극작가였다는 점이다.

푸치니는 본래 오페라를 비극의 한 종류로 여겼으며, 이야기의 서두와 중반에 유쾌하고 희극적인 장면이 들어가는 구성을 용인하기는 했지만 항상 결말에 이르러 비극적인 정서로의 방향 전환을 이루어 내곤 했다. ‘오페라란 곧 비극의 표현’이라는 관념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푸치니의 작품세계에서 오페라 '투란도트'의 평화적이고 진취적이며 화합이 달성되는 형태의 결말은 그가 다루어 본 예술영역 밖의 일이었던 것이다.

이외에 그가 마지막 '사랑의 이중창(Principessa di morte)'을 완성하지 못한 원인에 대한 다른 분석도 존재한다. 당대의 멋쟁이로 유명했던 푸치니는 다른 여성들이 자신을 유혹할지언정 본인이 다른 이성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안절부절못한 적이 거의 전무했다. 따라서 그러한 열렬한 사랑에 빠져보지 못한 경험의 부재가 한 사람이 다른 이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특히 여성이 남성을 사랑하는 과정을 그릴 수 없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뒷받침이지만 그의 오페라 작품들에 등장하는 여주인공들은 막이 올라가고 어떤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늘 상대에게 한눈에 반하거나 혹은 이미 사랑하고 있는 사이로 등장한다. 이별의 슬픔과 고통에는 익숙했지만 풋풋한 단계에서부터 사랑에 빠져가는 여주인공 투란도트는 푸치니에게 있어 너무나 멀게 느껴지는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 투란도트, 미완의 포고

1926년 4월 25일, 라 스칼라 극장에서 열린 오페라 '투란도트' 초연은 푸치니의 막역지우인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지휘를 맡았다. 토스카니니는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을 비롯해 '토스카', '나비부인' 등을 지휘하면서 공연을 성공적으로 이끈 바 있었다. 이따금씩 불화와 화해를 반복하긴 했음에도 푸치니는 자신의 음악을 가장 잘 살려줄 지휘자가 토스카니니임을 잘 알고 있었다.

푸치니가 세상을 떠나던 날, 토스카니니는 라 스칼라에서 리허설 중이었다. '투란도트'의 극본가들 중 하나인 주세페 아다미가 아무런 연락도 없이 리허설 무대에 불쑥 등장하자 토스카니니는 그의 표정만을 보고도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짐작했다. 곧바로 리허설을 중지한 토스카니니는 아다미와 함께 지휘자 대기실로 향했고, 푸치니의 비극적인 임종 소식을 전해 듣는다.

이후 토스카니니는 푸치니의 유작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크게 애를 썼다. 그의 노력 끝에 드디어 '투란도트'는 초연에 오르고, 라 스칼라에 모여든 엄격한 관객들 앞에서 푸치니의 유작은 순항을 거듭하고 있었다. 관객들의 몰입도도 뛰어나 3막에서 류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면에서는 모두가 숨을 죽이고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관객들의 집중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갑작스레 그 적막을 깼다. 지휘봉을 내려놓은 그는 관객들을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에스트로 푸치니가 작곡한 부분은 여기까지입니다.”

친구이자 동료이며 당대 최고의 작곡가였던 푸치니의 죽음, 그리고 그의 유작에 바치는 최고의 예우이자 찬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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