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마 콘텐츠로 풀어보는 오페라 이야기

▲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서울=국제뉴스) 정경 칼럼니스트 = 오페라 '리골레토'는 베르디의 오페라 작곡 활동 시기 중 중기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베르디의 창작기는 크게 3기로 나뉜다.

'산 보니파치오 백작 오베르토', '나부코', '루이자 밀러', '맥베스', '스티펠리오' 등의 작품을 초기, '일 트로바토레', '라 트라비아타', '돈 카를로스' 등의 작품을 중기, '아이다', '오텔로', '팔스타프' 등의 작품을 후기로 분류한다. 이 중 오페라 '리골레토'는 베르디의 창작기 중 중기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었다.

개정한 작품을 제외하면 베르디는 총 26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는데 그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이 바로 '리골레토'였다. 이전에도 나름의 성공작은 있었지만 오페라 '리골레토' 이후 베르디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왕'이라는 칭호를 얻을 만큼 이탈리아 음악계에서 거장으로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게 된 것이었다.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는 빅토르 위고가 1832년에 집필한 희곡 '환락의 왕'을 바탕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노트르담 드 파리', '레미제라블', '바다의 노동자' 등 걸출한 명작을 남긴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작가 빅토르 위고는 민중의 중심에 선 공화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는 개혁적인 정치 성향을 바탕으로 신분제 타파를 외치며 민주주의를 주창했다. 나폴레옹 3세의 친위 쿠데타 당시 반대파로 활동하다가 국외로 추방되어 19년간 망명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작가의 성향을 그대로 반영한 희곡 '환락의 왕'은 당시 귀족과 왕족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군주와 귀족들이 벌이는 온갖 방탕과 악행을 집중 조명하는 동시에 꼽추인 광대가 왕을 암살할 계획까지 세운다는 내용이 더해졌는데, 이로 인해 당대 사회 권력층 사이에서 문제작으로 떠오르며 파란을 일으켰다.

초연 때에는 왕을 암살한다는 설정을 두고 귀족과 평민 관객 간 격한 충돌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 작품은 결국 단 하루의 공연을 끝으로 상연금지 처분을 받고 말았다.

베르디는 이 희곡 작품의 도발적이고 파격적인 내용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의 압제 하에 놓여 불만에 가득 찬 국민 정서가 팽배했으며, 동시에 전제정치에 대한 혁명사상이 싹트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민족과 민중적인 정서를 자신의 오페라에 담으려 애써 온 베르디는 이전보다 혁신적이고 자극적인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희곡 작품 '환락의 왕'을 접한 베르디는 "이 이야기와 주제라면 절대 실패할 리가 없다"며 확신했다.

오페라 제작을 결심한 베르디는 1844년에 공연된 오페라 '에르나니' 때부터 함께 일한 극본가 프란체스코 마리아 피아베에게 오페라 대본의 각색을 부탁한다. 이때 베르디가 피아베에게 보낸 편지에는 '환락의 왕은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이야기', '가장 아름다운 희곡', '왕의 광대인 트리불레는 셰익스피어에 비견할 만한 인물상'과 같은 예찬이 가득했다. 피아베에게 각색된 대본을 넘겨받은 베르디는 40여 일 만에 작곡을 마친다.

작품은 완성되었지만 오페라 '리골레토'는 곧바로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검열 때문이었다. 희곡 '환락의 왕'에서 문제가 되었던 부분이 마찬가지로 베르디의 발목을 잡았다. 방탕과 향락에 물든 왕과 귀족에 대한 묘사가 문제였다. 더군다나 오페라 무대 위에서 왕의 암살을 연기하는 일은 오스트리아 왕가 지배하에 있던 이탈리아에선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원작에서 정치적으로 혹시나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은 극본가였던 피아베가 미리 손을 보았지만 오스트리아 왕가의 검열은 예상 이상으로 혹독했다. 그들은 베르디와 피아베를 혁명을 꿈꾸는 불순분자로 분류하기 시작했고, 결국 공연은 불허되고 말았다. 절박해진 베르디는 피아베에게 온몸을 던져서라도 공연 허가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줄 유력 인사를 찾아 달라는 편지를 보내기에 이른다.

▲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에 출연한 바리톤 정경 교수 (사진=오페라마예술경영연구소)

결국 베르디는 원작의 무대를 바꾸기로 결심한다. 원작 희곡이 배경으로 삼았던 프랑스 궁정은 이탈리아 만토바 궁정으로 교체되고, 등장인물의 이름도 대부분 새롭게 바뀌었다. 프랑스의 왕 프랑수와 1세는 만토바 공작으로, 꼽추인 트리불레는 리골레토로, 그의 딸 블랑쇠는 질다로, 자객 실타바타르는 스파라푸칠레로 바뀌었다.

과거에는 풍요로운 국력을 자랑했지만 대가 끊기며 역사 속으로 사라진 만토바 공국의 공작을 비판 대상으로 삼았기에 오페라는 내용적인 면에서 검열을 피할 수 있었다. 현존하지 않는 인물과 왕가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 오스트리아의 검열관들은 제재를 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검열은 또다시 '환락의 왕'이라는 제목을 걸고넘어졌다. 베르디는 부랴부랴 작품의 제목을 '저주'로 바꾸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제목 역시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고, 결국 베르디는 제목을 주인공의 이름을 딴 '리골레토'로 바꾸게 되었다.

이와 같은 우여곡절 끝에 오페라 '리골레토'는 1851년 3월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극장에서 초연에 오르고, 그야말로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무자비한 검열 탓에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는 원작이 담고 있던 수준의 사회 비판을 완전히 재현하지는 못했다. 문학과 달리 무대 예술이라는 오페라 장르 자체의 한계가 작용했음에도 베르디는 오페라만이 선보일 수 있는 극적 효과를 자유자재로 이용해 이를 극복해냈다.

오페라 '리골레토'를 통해 관객들은 처음으로 긴 대사 없이 빼어난 선율과 노래만으로도 사회를 비판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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