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마 콘텐츠로 풀어보는 오페라 이야기

▲ 바리톤 정경 (사진=오페라마예술경영연구소)

(서울=국제뉴스) 정경 칼럼니스트 = 이탈리아 오페라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세 거장이 있다. 로시니, 벨리니, 그리고 도니제티가 바로 그들이다. 이어 그들의 시대에서 오페라의 역사를 정통으로 계승하고, 또 발전시켜 오페라라는 예술 자체를 궁극의 경지에까지 올려놓은 '오페라의 왕'이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바로 주세페 베르디라고 한다.

1813년 10월 10일, 북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인 롤콜레에서 태어난 베르디는 당시 나폴레옹 치하에 있던 이탈리아의 정세 때문에 조셉 포르튀냉 프랑수아 베르디라는 프랑스식 이름으로 출생신고를 마쳤다. 갓 돌 무렵인 1814년 이탈리아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연합군의 침공을 받았고, 어린 베르디는 어머니 품에 안겨 성 미카엘 교회의 지하 밀실로 피난생활을 해야 할 정도로 어수선한 정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의 아버지인 카를로 주세페는 식료품점 겸 여인숙을 운영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세페 여인숙에 머물게 된 떠돌이 바이올리니스트가 음악과는 거리가 먼 유년기를 보내고 있던 베르디를 눈여겨보게 된다.

아들에게 음악을 가르쳐보길 권유하는 떠돌이 음악가의 말을 듣고 놀란 카를로는 그날로 베르디를 마을 교회에 보내 음악을 배우게 한다. 오르간을 배우기 시작한 베르디는 곧바로 두각을 나타내더니 10세 즈음에는 교회의 오르간 주자로 활약한다.

이후 음악계에 입문한 베르디에게는 기회가 끊임없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유복한 친구이자 오르간 연주자였던 안토니오 바레치의 도움으로 큰 도시에 위치한 중학교로 진학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바레치는 베르디의 음악적 재능을 높이 여겨 당시 유명 음악가였던 프로베시에게 작곡을 배울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이후 베르디는 1831년부터 밀라노에서 3년간 머물며 작곡 수업을 받는다.

21세가 된 베르디는 고향으로 돌아와 음악감독으로 일하기 시작하는데 그와 동시에 자신의 은인인 바레치의 딸, 마르게리타와의 사랑을 키워나간다. 2년간의 열애 끝에 부부의 연을 맺은 마르게리타와 베르디의 앞날에는 꽃길만 펼쳐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혼인 1년 만에 찾아온 딸과 아들이 병마로 차례차례 세상을 떠나고, 아내인 마르게리타마저 이듬해 2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크나큰 충격과 상심에 빠진 베르디는 슬픔을 조금이라도 잊어보기 위해 창작활동에 전념하지만 그 결과 역시 참담했다. 베르디는 작곡가로서의 절필을 선언하며 자살 문턱까지 이르지만 다행히 주변의 도움과 설득으로 가까스로 작곡가의 삶을 다시 시작한다.

1842년 3월, 스칼라 극장의 무대에 올린 오페라 '나부코'가 당시 외세의 압제에 시달리던 이탈리아 국민들의 마음을 울리면서 베르디는 재기에 성공하는 동시에 음악가로서의 전성기를 펼치게 된다.

이후 베르디는 인류사의 보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오페라 걸작들을 무수히 탄생시킨다. '리골레토'(1850), '일 트로바토레'(1853), '라 트라비아타'(1853), '돈 카를로스'(1867), '아이다'(1871), '오텔로'(1887) 등의 오페라 작품은 오페라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남았다.

음악가로서의 만년을 맞아서는 통일 이탈리아의 정치가로서 활동하는 등 오페라 작품 창작 활동에 전념하지는 않았으나, 이탈리아의 시인 알레산드로 만초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작업한 '레퀴엠' 등의 걸작을 남겼다. 1901년 1월 27일, 밀라노의 한 호텔에서 뇌질환으로 쓰러져 일생을 마감한 베르디의 장례식에는 무려 20만 명이 넘는 군중이 참석하여 거장의 죽음을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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