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마 콘텐츠로 풀어보는 오페라 이야기

▲ 바리톤 정경 (사진=오페라마예술경영연구소)

(서울=국제뉴스) 정경 칼럼니스트 = 오페라 '사랑의 묘약'에서 다른 작품들에 비해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바로 등장인물의 신분이다. 대개의 오페라 극 구성에서는 등장인물들 간의 신의 차이가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인물의 개성이 설정되고 선역과 악역의 배분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신분 차이라는 설정은 등장인물들이 겪을 비극적 사건을 암시하는 역할도 수행한다. 이는 오페라뿐 아니라 당대의 서사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특징이기도 하다. 이처럼 사회적 영향력, 신분의 차이는 극 중 인물들의 개성을 상징하는 동시에 스토리와 갈등관계를 형성하는 큰 축으로 자리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페라 '사랑의 묘약'에서는 이러한 요소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순박한 시골 사람들뿐이다. 또한 극 중 이야기의 향방을 휘어잡는 비범한 인물도 등장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비범한 능력을 지닌 등장인물은 선악과는 관계없이 극의 전개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인 법이나, 오페라 '사랑의 묘약'은 막을 올리는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평범한 시골 사람들뿐이다.

한 술 더 떠 '사랑의 묘약'에는 뚜렷한 악역도 존재하지 않는다. 심술궂고 악랄한 귀족이나 부자, 혹은 하수인도 없다. 주인공 네모리노의 라이벌인 벨코레는 그저 라이벌 관계일 뿐 선의의 실현을 위해 타도할 악역이라고는 볼 수 없다. 네모리노를 속이는 약장수 둘카마라 역시 사기꾼이긴 하지만 관객들에게 사랑받는 인물에 가깝다.

오늘날의 대표적인 서사 매체인 영화나 TV 드라마에서도 선과 악의 구분, 신분의 차이, 비범한 인물 등의 설정은 다소 상투적일지언정 대다수의 작품에서 핵심적인 요소로 꼽힌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오페라 '사랑의 묘약'이 서사 장르 중에서도 얼마나 독특한 입지를 가진 작품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랑의 묘약'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등장인물들만으로 짜임새 높은 작품의 반열에 오르고 흥행의 주역이 된 것일까? 그 답은 바로 ‘아이러니’다. 이는 우리가 흔히 쓰는 반어법과도 같다. 즉 상황적으로 반대되는 사건이 극의 정서와 흐름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인데, 예를 들어 비극적 상황이 펼쳐졌을 때 비극의 중심에 선 인물만 그 사실을 모른 채 우스운 말만을 한다면 관객들은 더욱 큰 슬픔을 느끼게 되는 상황과 같다.

반대로 희극적 상황에서도 희극의 대상이 된 인물이 진지하게 행동한다면 관객들에게 있어 그보다 더 흥미로운 일은 없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의도와는 정반대로 흘러가는 상황을 적절히 이용하는 기법을 두고 극 중의 아이러니라고 말한다.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아이러니적 요소들은 관객들의 주의를 끊임없이 환기시키면서 흥미를 자아낸다. '사랑의 묘약'은 끊임없는 아이러니의 반복이다. 네모리노는 아디나의 마음을 얻기 위해 둘카마라에게 사랑의 묘약을 사서 마시지만 아디나의 마음은커녕 오히려 반감만 사게 된다.

당장 오늘 결혼식이 열린다는 것을 안 네모리노는 사랑의 묘약을 하나 더 구입하기 위해 군에 입대를 결정하고, 이 선택은 훗날 네모리노의 발목을 잡게 된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중에 이 모든 상황을 꿰뚫고 있는 것은 오로지 관객들뿐이다.

네모리노가 마을 처녀들에게 환대를 받을 때에도 아이러니가 형성된다. 숙부의 유산을 물려받게 되어 마을 처녀들이 네모리노에게 잘 대해주는 것이지만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네모리노는 사랑의 묘약이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믿고 마는 것이다.

아디나 역시 아이러니함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인물이다. 아디나의 모순적이고 반어적인 성격은 결혼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녀의 결혼식은 철저히 네모리노를 골탕 먹이기 위해 기획된 것이었음에도 오히려 그녀는 결혼식을 계기로 네모리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깨닫고 그를 신경 쓰기 시작한다.

극 전체를 아우르는 아이러니의 절정은 핵심 소재인 '사랑의 묘약'이다. 극에서 사랑의 묘약은 아무런 효능도 없는 사기꾼의 술책에 불과하다. 그런데 결국 이 싸구려 포도주로 인해 네모리노와 아디나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되니, 이보다 더 큰 아이러니가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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