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마 콘텐츠로 풀어보는 오페라 이야기

▲ 바리톤 정경이 지난 14일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로시니의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 중 피가로의 아리아를 공연하고 있다. (사진=오페라마예술경영연구소)

(서울=국제뉴스) 정경 칼럼니스트 = 이탈리아 오페라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로시니는 '세비야의 이발사', '신데렐라', '세미라미데' 등 희가극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만년에는 우리에게 '윌리엄 텔'로 알려진 대작 오페라의 원작, '기욤 텔'을 작곡하기도 했다.

1792년 태어난 로시니는 비록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오페라 작곡을 하기에 좋은 환경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아버지인 주세페 로시니는 악대와 관현악단 등에서 연주생활을 하던 트럼펫 연주자였고 어머니인 안나 구이다리니는 가수였다.

유명 연주자가 아니었던 그들은 생계를 위해 매번 무대에 올라야 했고, 그 결과 로시니는 자연스럽게 공연장에서 부모의 모습을 지켜보며 시간을 보냈다. 당대의 거장 작곡가들의 영재교육과는 다르게 음악과 예술에 조금씩 젖어가는 유년기를 보낸 것이다.

로시니는 공부와 거리가 먼 이른바 게으른 학생이었다. 반면 노래와 연극에는 열성적이었다. 오페라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보인 그는 14세 때 오늘날 마르티니 국립음악원으로 불리는 볼로냐 음악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듬해에는 첫 오페라 작품인 '도메트리오와 폴리비오'를 작곡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로시니는 생계를 위해 음악에 몰두했다. 돈만 된다면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고 때로는 바이올린, 호른, 하프시코드 연주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몸을 혹사할 수밖에 없는 생활 속에서 목소리가 상해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된 로시니는 결국 다른 길을 모색하게 된다. 그가 선택한 길은 바로 지휘자였다. 이처럼 젊은 시절 경험한 배우, 성악가, 연주자, 지휘자 등의 다채로운 경험은 훗날 로시니가 작곡가로서 오페라를 작곡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위트 넘치고 유머러스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로시니는 대중들에게 때때로 괴짜로 비치곤 했다. 활발하고 밝은 그의 성격은 희가극을 만드는 데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밝고 해학적인 내용을 주제로 삼는 오페라 부파는 그야말로 로시니와 딱 맞는 장르였다.

그가 연이어 발표한 오페라 및 희극 작품들은 청중들에게 큰 호응을 이끌어냈고 로시니는 열광적인 인기를 구가하게 된다.

그는 예술 작품을 창작하는 데 있어 새로운 시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첫 오페라 부파 작품인 '결혼 어음'에서는 오페라 장르로서는 이례적인 관현악 편성으로 가수와 출연진을 곤혹스럽게 했다.

이전의 오페라에서 관현악은 가수들의 멜로디를 따라가며 가창을 도와주는 역할을 주로 맡았지만 로시니는 그 존재감을 훨씬 키워 가수의 노래가 음악의 일부가 되도록 조정했다. 또한 로시니는 이탈리아의 현란한 가창법인 벨칸토 창법을 새롭게 발전시키기도 했다.

1812년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으로 진출한 로시니는 첫 작품으로 '시금석'을 무대에 올린다. 이 작품은 로시니의 진가가 발휘되기 시작한 첫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로시니는 극장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공연문화와 기획에 관하여 상당히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게 되었다. 그의 작품을 어렵고 불편하다며 피하던 가수들도 그의 예술성과 도전정신에 점차 호응하기 시작했고, 이에 힘입은 로시니는 7편의 오페라를 연달아 작곡한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성공을 거둔 로시니는 엄청난 유명세에 시달리게 되었고, 자신이 활동하는 지역 밖으로도 그 명성이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나폴리의 극장에서는 로시니를 직접 찾아와 1년에 두 편의 오페라만 작곡해달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계약을 요청하기도 한다. 이후엔 로마와 베네치아에서도 파격적인 조건의 러브콜을 받는 등 로시니는 최고의 인기를 누린다.

절세의 성공가도를 달리던 로시니는 이탈리아에서의 생활에 질린 나머지 1823년 11월, 이탈리아에서의 생활을 모두 정리하고 무작정 파리로 떠난다.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파리에 입성한 로시니는 당시 유럽의 중심이었던 파리를 마음에 들어했고, 다시금 작품 활동을 이어나간다. 이때 작곡된 작품이 바로 오페라 '코린트의 포위', '오리 백작', '기욤 텔'이다. 특히 오페라 '기욤 텔'은 민족주의와 자유라는 고상한 주제를 다루었으며, 파리 청중들은 물론 비평가들에게도 커다란 갈채와 찬사를 받았다.

모든 것을 이뤘다는 자족이었는지, 혹은 예술 활동에 염증을 느낀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로시니는 오페라 '기욤 텔'을 마지막으로 음악 활동을 접는다. 여기엔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다. '기욤 텔'이 파리 오페라 극장 개관 기념 오페라 중 첫 번째 작품으로 선정되었으나 1830년 프랑스에 들어선 7월 왕정의 압력으로 인해 공연이 좌절된 탓이었다.

현역에서 은퇴한 로시니는 종교음악이나 몇몇 소품을 작곡했지만 대외적으로 작곡활동을 이어나가지는 않았다. 사교 파티에서 사람들과 만나고 자신의 저택과 별장에 지인들을 초대해 만찬을 베푸는 것을 즐기는 등 편안한 노후를 보낸 로시니는 혜성처럼 등장한 후배 작곡가들에게 길을 내주며 잠시 대중들에게 잊힌다.

이후 1950년대에 이르러 그의 오페라 작품들이 재조명되고 각광을 받기 시작하며 조아키노 로시니의 이름은 다시 한 번, 이번에는 보다 넓고 길게 세상에 퍼져 나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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