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마 콘텐츠로 풀어보는 오페라 이야기

▲ 오페라마예술경영연구소 바리톤 정경 소장

(서울=국제뉴스) 정경 칼럼니스트 = 이야기 전반에 걸쳐 여성들을 끊임없이 유혹하는 돈 조반니의 행적은 그야말로 문란하다고 표현할 수 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귀족으로서의 신분을 이용하는 데에도 주저함이 없으며 때로는 뻔뻔할 정도로 대담한 행각을 벌인다.

극의 위기감과 고조감이 절정을 맞이하는 결말 장면에서 자신이 죽인 코멘타토레의 석상과 마주하는 돈 조반니의 모습은 그야말로 당당하고 거침이 없다. 모차르트 당대의 관객들은 죽음에 맞선 위기에도 위축되지 않고 자기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고수하는 이 희대의 바람둥이를 진심으로 미워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돈 조반니의 면모가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 바로 2막에 등장하는 세레나데, '창가로 오라, 그대(Deh viene alla finestra)'이다. 자신이 유혹한 다음 결별을 선언하고 이후 그 존재조차 잊어버린 여인을 다시금 유혹하면서 위기를 벗어나려는 후안무치는 과연 어떤 자신감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일까. 요즘 말로 표현해 전형적이고 완전한 경지에 이른 '나쁜 남자'였던 것이다.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만큼 주제의식이나 사회적인 메시지가 명쾌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모차르트는 돈 조반니란 인물을 통해 다시 한번 당대의 신분제와 귀족 계급의 타락을 비판했다.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라 말하는 귀족의 품위나 책임과 같은 덕목은 돈 조반니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그의 심장과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동물적인 욕구일 뿐, 명예나 사랑과 같은 가치가 아니다. 자신의 욕구를 풀기 위해 하인과 옷을 바꿔 입는 것도 주저하지 않으며, 신분 따윈 개의치 않고 유혹해대는 돈 조반니의 모습은 마치 '타락'이라는 단어가 인간화된 것처럼 느껴진다.

돈 조반니의 타락한 면모는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서 비슷한 유형의 인물인 알마비바 백작과 비교해보면 훨씬 두드러진다. 물론 알마비바 백작도 바람기 충만하고 여러 문제를 일으키는 인물이긴 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귀족이며 그에 따른 체면을 지켜야 한다는 자각은 온전히 가지고 있었다. 비록 허울뿐인 권위이나 자신을 조롱하는 하인 피가로에게 분노했고, 하녀인 수잔나에게 접근하기 위해 은밀하게 음모를 꾸몄다.

그에 반해 돈 조반니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고자 함에 있어 노골적인 수준을 넘어 거침이 없다. 이러한 행위나 사고방식 자체를 스스로 당당하게 여기는 돈 조반니에게 음모나 치밀한 계획 따윈 불필요한 것이다. 권위의식도, 명예도, 수치심도 모르는, 실은 평민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당대 귀족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인물이 바로 돈 조반니였던 것이다.

돈 조반니의 파격적인 정체성은 독창 아리아 파트 배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오페라에 등장하는 인물은 최소한 하나의 아리아를 노래하는데, 중요한 인물일수록 아리아의 비율이 커진다. 즉 아리아는 인물의 존재 의미와 작품의 주제 의식을 전달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다.

따라서 오페라 '돈 조반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 엘비라, 안나, 오타비오, 하인 계급의 마세토와 체를리나 등은 적어도 한 곡 이상의 독창을 담당한다. 그런데 이 중 주연인 돈 조반니는 정상적인 상태에서 부르는 아리아가 단 한 곡도 없다.

독창 아리아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고주망태가 되어있거나 레포렐로의 옷을 입고 돈 조반니라는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크게 드러내지 않고 부르는 부분뿐이다. 이는 곧 귀족으로서 그리고 정상적인 인간으로서 돈 조반니는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해서는 안 되는, 따라서 하나의 온전한 역할을 부여받아서는 안 되는 인물로 묘사된 것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

◇ 돈 조반니를 완성시킨 하인, 레포렐로

돈 조반니를 언급하면서 빠질 수 없는 등장인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심복인 레포렐로이다. 그는 1막 첫 장면에서 주인을 위해 밖에서 망을 보는 동시에 주인이 행하는 악행들을 일일이 장부에 기록한다. 레포렐로를 관찰해보면 주인에 대한 존경심은 그다지 없어 보이며, 심지어 그의 아리아에서는 돈 조반니에 대한 노골적인 경멸까지 느껴진다.

또한 레포렐로는 주인에게 불만을 표하는 것에도 주저함이 없다. 2막이 시작되자마자 돈 조반니와 레포렐로가 함께 부르는 곡 '적당히 하자(Eh via, buffone)'에서는 레포렐로가 자신의 주인이 부른 선율을 그대로 따라 부르면서 더 이상 이런 추잡한 노릇을 견딜 수 없다며 주인을 떠나겠다는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욕망을 풀기 위한 뒤치다꺼리를 위해 레포렐로가 꼭 필요했던 돈 조반니는 그럴 때마다 용돈을 쥐어주며 그의 기분을 풀어주려 애쓴다.

그렇다면 레포렐로는 돈 조반니가 정말 증오스럽거나 경박해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일까? 그의 반항과 건방짐의 이면에는 숨은 욕망이 교묘하게 도사리고 있다. 같은 하인의 신분이지만 레포렐로는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 등장하는 피가로나 수잔나처럼 주체적이고 자신의 권리를 찾아 나서는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당대 권력자의 삶에 동경심을 지닌 인물에 가깝다. 쉽게 말해 레포렐로는 돈 조반니와 같은 삶을 꿈꾸는 인물인 것이다.

따라서 레포렐로는 자기 주인의 삶이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이기에 그 모습을 지키기 위해 툴툴대면서도 최선을 다한다. 그것은 곧 자신이 추구하는 길이 실패와 패배로 이어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돈 조반니를 구해주기 위해 옷을 바꿔 입기도 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추격자들을 따돌리기도 한다. 체를리나에 대한 조반니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성안의 연회라는 계략을 만들어낸 것 역시 레포렐로였다. 동시에 기회가 올 때마다 레포렐로 자신도 돈 조반니를 흉내 내어 여성들에게 집적대는데 너무 미숙한 나머지 매번 실패하고 조롱거리로 전락한다.

타락한 귀족인 자기 주인에게 반항하며 돈이라는 현실적인 이득을 챙기는 동시에 그를 조롱하는 아리아를 부르는 레포렐로. 그럼에도 제2의 돈 조반니를 꿈꾸고 그 악행을 답습한다는 점에서 그는 더할 나위 없는 악당의 심복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인간으로서의 역설적인 입체성을 띈 레포렐로의 존재가 없었더라면 전설적인 옴므 파탈(homme fatale), '돈 조반니'는 완성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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