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마 콘텐츠로 풀어보는 오페라 이야기

▲ 바리톤 정경 성악가

(서울=국제뉴스) 정경 칼럼니스트 = ‘예술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예술인이 품을 수 있는 가장 크고 무거운 화두임에 틀림없다. 지구를 중심으로 우주가 돈다는 시절이 있었다. 서양의 중세시대는 이른바 신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다. 그와 같은 권위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이들이 고통을 겪고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잃던 시대였던 것이다.

사회의 구조 역시 불공평하고 합리적이지 못했다. 농업, 상공업에 종사하는 서민들이 흘리는 피와 땀에 무임승차하는 귀족과 왕족들이 사회를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출신이 평민이라면 제아무리 재능이나 업적이 뛰어나도 끝내 귀족이 될 수 없었다.

이에 변화를 염원하는 목소리는 점차 늘어났지만 수백,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고착화된 사회 구조의 변혁을 이끌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인습과 사회적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인간다워지기를 처절하게 갈망했던 모차르트.

그가 남긴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는 자신을 포함한 당시 평민들의 자유에 대한 갈망과 사회 모순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고스란히 담겨있다.

◇ 피가로의 결혼, 그 수난

점차 다가오는 시대의 정신을 담고 있는 작품, 특히나 당대의 사회나 지배 구조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작품이 중세 시대의 주류 예술 향유층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는 어려웠다.

집권층이었던 왕족과 귀족들은 '피가로의 결혼'이라는 작품 자체를 매우 불쾌한 사상과 정신을 담은 작품이라며 선을 그었다. 그 결과 '피가로의 결혼'이라는 제목을 단 연극과 오페라는 모진 수난을 당하게 되었다.

1781년 프랑스의 국립극장인 코메디 프랑세즈의 상연 목록에는 연극 '피가로의 결혼'이 기재되어 있었다. 그런데 작품 초연에 앞서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린 희곡 낭독회에서 '피가로의 결혼'을 접한 프랑스의 국왕 루이 16세는 저속하기 이를 데 없는 작품이라며 혹평했다.

귀족 사회를 비판하는 피가로의 독백에 대해선 '혐오'라는 단어까지 거론하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는데, 어쩌면 루이 16세는 이 작품이 지닌 위험성을 본능적으로 느꼈던 건인지도 모른다.

결국 연극 '피가로의 결혼'은 상연 여부 자체가 불투명해지고 말았다. 여섯 차례의 검열과 더불어 과연 이 작품이 상연에 적합한 것인가를 두고 격렬한 토론회가 열리기도 했다.

원작자인 보마르셰는 상황에 굴하지 않고 따로 희곡 낭독회를 개최하면서 작품을 알리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그 결과 1783년, 므뉘 플레지르 극장에 상연 계획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루이 16세는 격노하여 직접 왕명을 내려 이 공연을 취소시키고야 말았다. 이에 보마르셰는 당당한 태도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국왕이 '피가로의 결혼' 공연을 원하지 않는다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공연은 무대에 올라야만 한다"

우여곡절 끝에 연극 '피가로의 결혼'은 1784년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초연을 성사시키고, 5년간 111차례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모차르트가 제작한 오페라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황제였던 요제프 2세는 악명 높은 원작 연극 '피가로의 결혼'에 대해 익히 들은 터라 모차르트의 오페라 제작 활동은 물론 그 결과물까지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귀족들 역시 자신들을 모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면서 황제의 편을 들었다.

이로 인해 원작을 오페라로 제작하려던 모차르트와 다 폰테도 황제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 원작에 담긴 직설적인 비판이나 거침없는 표현들을 삭제하거나 누그러뜨려야 했다. 심지어 황제 앞에서 연주를 할 때에는 일부 장면을 편집하여 무대에 올리곤 했다. 불과 6주 만에 작곡을 마친 작품이 실제 초연까지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린 데에는 바로 이러한 사연이 숨겨져 있었다.

◇ '피가로의 결혼'은 무엇을 낳았나

이토록 무대에 오르기까지 숱한 고난을 겪은 작품이 예언이라도 한 듯 '피가로의 결혼'이 초연에 오른 3년 뒤, 인류 역사를 뒤흔들 규모의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이다.

'피가로의 결혼'이 작품에서 다루었던 주제 의식이 현실 속에서 그대로 실현된 이 사건을 통해 예술 작품에 난도질을 해댄 당대의 왕족과 귀족들은 더 이상 웃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일을 예견이라도 한 듯 귀족 계층과의 갈등을 겪던 원작자 피에르 보마르셰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는 지금의 독자를 위해 쓴 것이 아니다. 너무 익히 알려진 악행에 대한 이야기는 감동을 줄 수 없으니까. 하지만 80여 년 뒤에는 결실을 낳을 것이다"

'피가로의 결혼'은 표면적으로 사랑 이야기지만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당시 사회를 지배하던 신분제도의 모순과 그에 대한 저항의식이 만연한 시대상이 담겨 있다. 이에 큰 호응을 보낸 것은 당대의 평민층이었으며 이들은 결국 자유를 위한 저항과 투쟁, 나아가 계몽의식의 주체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이 이야기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아직 우리 인류가, 그리고 우리 사회가 불의에 시달리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극 중 주인공인 피가로는 귀족의 억압과 부조리에 대해 순응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대항하고 맞서기로 결심했으며, 인고의 시간을 거쳐 해피엔딩을 이루어낸다.

어쩌면 보마르셰와 모차르트가 미래의 세대를 위해 남기고 싶었던 것은 단순히 어떤 이야기나 음악 혹은 예술 작품이 아닌, 현재를 극복하고 나아가기 위한 시대정신이었던 것은 아닐까.

*본 칼럼은 국제뉴스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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