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丁經, Claudio Jung)(www.claudiojung.com)
바리톤 성악가. 오페라와 드라마를 융합한 ‘오페라마(Operama)’를 창시했으며, 예술경영학 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사)오페라마 예술경영연구소(www.operama.org) 소장으로 한세대학교 예술경영학과에 재직 중이다. 저서 ‘오페라마 시각(始覺)’.

▲ 오페라마 예술경영연구소 정경 소장

이탈리아 유학 시절, 고대 로마 유적인 아레나 디 베로나(Arena di Verona)에서 열리는 오페라 축제를 관람하러 간 적이 있다. 이 축제는 주세페 베르디 탄생 100주년을 맞은 1913년 8월 10일 처음으로 개최되어 최대 3만 명을 수용하는 원형 극장에서 해마다 약 50회의 오페라 공연을 올리고 있다. 매회 전석이 매진이나 다름없으니 총 150만 인파가 몰려드는 세계적인 문화예술 축제인 셈이다. 이날은 베르디의 작품 가운데 하나인 ‘라 트라비아타’가 상연되는 날이었다.
 
공연을 즐기던 도중 나는 옆자리에 앉은 영국인 남성과 친해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영국에서 구두를 수선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그는 베로나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돈을 번다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음악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이탈리아에 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꿈을 꾸듯 흘러가는 세 시간여의 오페라 관람 시간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더할 수 없는 낙이며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했다.     

1960년대 영국의 문화정책을 살펴보면 이러한 영국인 친구가 탄생한 것도, 영국이 문화대국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당시 영국 정부는 미취학 아동을 둔 가정에 미술관, 공연장, 박물관을 무료나 다름없는 금액으로 개방했다. 그 결과 국민들은 자연스럽게 가족 단위로 다양한 예술 작품을 누리고 즐기며 여가를 보내게 되었다. 그들은 자국의 문화와 예술에 깊은 자긍심을 가지게 된 것은 물론이고, 영국의 자랑인 비틀스 등 수많은 문화유산과 걸작이 탄생하는 데 충분한 토양을 만들어줄 수 있었다.
 
당시 문화정책의 혜택을 받은 어린이들은 오늘날 기득권으로 장성하였다. 세계적 명물로 자리 잡은 에든버러 축제 등을 기획하고 있으며 코벤트 가든 왕립 극장과 같은 대규모 극장을 설립하면서 전 세계의 문화적 흐름과 유행을 주도하고 있다. 다음 세대를 위한 정책을 고민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으며 이를 통해 세대 간에 문화적 유대감을 형성하고 선순환적 연결고리를 구축하는 데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의 문화정책에는 여전히 아쉬운 면이 많다. 예술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실질적인 기간은 초등학교 교과 과정이 전부이다. 중고등학교 교육 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음악, 미술, 체육은 성적이나 진학을 뒷받침하기 위한 부가적인 과목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20대의 대학생활은 30대의 초기 사회생활을 위해 거쳐 가야 하는 하나의 과정 정도로 여겨지고 있다. 결국 경제적, 시간적 여유를 확립한 뒤 예술을 본격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시간은 빨라야 40~50대에나 찾아오게 된다. 기초예술과의 접점을 형성하는 데 10대부터 40대까지 약 30년간의 ‘문화적 공백’이 생기는 것이다.
 
이와 같은 긴 공백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술을 그저 삶의 부차적인 요소로 여기게 만들었다. 더불어 예술 작품을 즐길 만한 경제적 여유를 갖추게 된다 해도 어떻게 접근하고 감상해야 할지를 몰라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분별없이 접해온 대중문화는 기초예술을 향유하기 위한 ‘입맛’을 되찾는 데 있어 큰 걸림돌로 작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차원에서의 문화적 결핍을 막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홍보와 교육을 통해 아이들에게 문화와 예술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이를 즐기는 방법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이는 잠재적인 미래의 문화예술 소비자와 생산자를 동시에 양성하는 것과 같으며, 문화의 융성과 국가적인 경쟁력에도 이바지하는 일이다.
 
문화적으로 비옥한 땅 위에서만이 예술을 통해 행복을 고취하는 꿈나무들이 자라날 수 있다. 이를 위한 우리 기성세대의 희생과 친절한 안내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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